한국 최초 여성치과의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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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처음처럼그렇게 댓글 0건 조회 146회 작성일18-07-01 22:3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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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여성 치과의사의 흔적을 찾아서[두 번째 조각]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치과의사…최금봉·박봉남·이순이·홍선양·김늠이·강홍숙·김소남
여성이 시민이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직업을 갖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의학의 긴 역사 중 여성이 치료의 대상이 아닌 의료행위의 주체로 등장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의‧치학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서 비슷한 양상이 발견된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1회 졸업사진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2018년 현재 ‘치의학의 역사’를 배우는 수업에서도 여성 치과의사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여성들이 치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인 ‘여성’ 치과의사들이 존재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이들의 존재가 배제되고 축소된 건 아닐까? 그건 비단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하는 옛날이야기의 후렴구일 뿐일까?
최초의 (남성)치과의사를 기억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 역시 기록될만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의도적으로 지워진 여성 치과의사들에 대해 그 의미와 가치를 복원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성으로 태어났든 혹은 여성으로 길러졌든, 여성 치과의사들은 ‘여성’과 ‘치과의사’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고민은 ‘여성 치과의사’의 삶에서 선택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혼재되고 연결돼 마음 속에서 오랜 기간 부유하는 질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직업인인 ‘여성치과의사’가 그 정체성을 세우고 ‘치과의사’로서 ‘남성 치과의사’와 같은 지위를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앞서 걸으며 길을 만들어 낸 선배들의 흔적을 찾고 또 현재의 ‘여성 치과의사’가 지난 길을 다시 거칠 후배들을 위해 좋은 흔적을 만드는 것이 만드는 것이 이 정체성 찾기의 시작일 것이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본과 3학년 이소희 학생이 ‘치의학의 역사’ 수업 시간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쓴 『여성 치과의사들의 흔적을 모아 만든 조각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소희 학생은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접근가능하고 기록이 남겨진 인물들에 대한 자료 외에는 구할 수 없었고 자료의 양과 질도 한정적이라,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떤 ‘흔적들’을 조사하는 기분이었다”며 “드문드문 남겨진 기록들을 엮다 보니 남은 천 조각을 모아 조각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이 분야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더 많은 자료가 발굴, 수집되고 이를 이용가능한, 의미 있는 형태로 정리하고 가공하는 ‘의미화’ 작업이 필요하다”며 “현재 여성 치과의사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 성취 등 또한 잘 기록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게 논문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본지는 『여성 치과의사들의 흔적을 모아 만든 조각보』를 총 4회로 나눠 연재할 예정이며, ▲최초의 서양 근대 여성 의사와 치과의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치과의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중심으로 본 여성 치과의사 ▲(이소희 학생이 생각하는 주제) 등이 다뤄질 예정이다.
두 번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치과의사’편에서는 최금봉과 박봉남 등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해당 편집자 주는 논문의 서문과 결론 부분에서 발췌‧정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1973년 경향신문 최금봉 기사 (출처 = 경향신문) |
최초의 한국인 여성 치과의사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각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돼 있어 이견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박봉남과 매지 최금봉이 후보로 거론된다.
이한수⑴는 매지(梅智) 최금봉이 1928년 일본 ‘동경’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Tokyo Women's Dental College: 1910~1947)를 졸업한 것을 들어 그가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근거로는 최금봉 자신의 증언을 들 수 있다. 최금봉의 생애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편인데, 최금봉 본인을 직접 인터뷰한 1973년 10월 25일 자 『내가 겪은 20세기 (60) 梅智(매지) 崔錦鳳(최금봉) 여사』 경향신문 기사⑵에 따르면 최금봉은 20세부터 진남포시 삼숭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며 지역민과 여학생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또 191년 삼일운동 실패 후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내기 위해 비밀결사대 진남포에서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수감됐다.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더 이상 교사로 일할 수 없던 최금봉은 동경여자치과전문학교에 입학, 1928년 본과를 졸업하고 1929년 동경여자치과의전 전공과를 졸업했다. 이후 평영과 진남포에서 개업했는데, 조선인 의사 중에서도 특히 여의사가 거의 없어 환자가 엄청나게 몰린 것으로 전해진다.
치과를 운영하면서도 여성들, 특히 식모 생활을 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을 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역에서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빈민구제,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1966년엔 삼일운동 선도자찬하상을 수상했다.
두 번째 후보인 ‘박봉남’은 최금봉과 달리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22년 명화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Meika Women's Dental College)로 입학했지만, 1926년 명칭이 바뀐 동양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Toyo Women's Dental College: 1917~1945)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게 된다.
박봉남이 1935년 촬영된 진료사진을 학교로 보냈는데, 이를 보면 『중화민국 박봉남 현치과치료실』⑶이란 흔적이 있다. 또 1985년 제작된 졸업생 명단을 보면 박봉남의 소속이 중화민국태만성고웅육군 제2총원으로 돼 있으며, 2016년 2월 Toyo Gakuen Universtiy의 Archives 자료를 보면 박봉남의 근무지가 중화민국 북평군 2조28로 돼 있다. 이후 박봉남의 구체적인 생애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졸업년도, 졸업학교는 참고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초의 한국인 남성 치과의사인 함석태가 일본치과대학(Nippon Dental University)를 졸업하고 1914년 2월 면허를 취득한 이후 거의 10년~15년 만에야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⑷
1935년 중화민국 박봉남 현치과 치료실 (출처 = 권훈, 최초의 유학파 여성 치과의사, W dentist, 2017, Vol 21(2) 40쪽) |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명부⑸를 보면 치과의사면허 번호 90번인 ‘이순이’가 ‘동양’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 1928년 졸업(소속 불명)으로 돼 있다. 199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창회 회원명부에 따르면 1925년 경성치과의학교 제1회 졸업생 명단에 여성으로 추정되는 김늠이, 강홍숙 두 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⑹
아울러 이한수⑺는 한국인 최초의 정규 치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 대해 “함석태 이후 일본에서 정규치의학 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각종 문헌 조사 결과 1931년까지 남녀 총 10명이며, 한동찬을 제외한 10명 중 여자는 이순이 외 4명”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기창덕⑻에 따르면 ‘동양’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이순이 외에도 홍선양(1931년 졸)과 김소남(1933년 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세계 제2차 대전 이전 일본에는 ▲‘동경’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Tokyo Women's Dental College: 1910~1947) ▲‘동양’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Toyo Women's Dental College: 1917~1945) 등 2개의 여자치과대학이 있었는데, 두 학교의 이름이 비슷하고 모두 도쿄에 있어 기록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동양’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의 경우 현재 Toyo Gakuen University로, ‘동경’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의 경우 현재 Kanagawa Dental University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최근 권훈이 Toyo Gakuen Universtiy의 Archives에 방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졸업명단에서 21명의 조선 출신 여성들의 이름이 확인됐지만, 그 명단엔 이순이와 홍선양의 이름이 없어 이들이 ‘동양’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 아닌 것이 확인됐다.⑼⑽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서 배출된 여성 치과의사의 숫자는 8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꽤 많은 숫자가 일본에서 면허를 취득한 것이다. 또 이 21명의 졸업생 외에도 입학은 했지만 졸업하지 못한 학생의 수가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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