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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칼럼

[Relay Essay-제2063번째] 인생이라는 순환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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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민 댓글 0건 조회 67회 작성일15-10-0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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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순환 속에서

Relay Essay-제2063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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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지나니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모든 감각이 하나둘 무뎌지는 걸 느끼며 쓸쓸한 마음으로 체념하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가을을 기다리는 설렘이 남아있음에 감사드린다.
어제 실버타운에 입소하신 어머님을 뵙고 왔다. 3년 전 60년을 같이 하신 아버님을 먼저 보내시고 오랜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어머님은 올해 초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버타운입소를 결정하셨다. 남편은 수험생엄마라는 무기로 무장한 나에게 조심스럽게 같이 갈 것을 종용했다. 어머님은 89세이신데 그 당시로서는 꽤 유복하고 개화된 집안의 맏딸로 자라나 명문고와 명문대학을 나오시고 미인대회에도 출전하실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시다. 내가 결혼할 때만해도 어머님은 건강하시고 자신감 넘치시는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어머님은 체력, 인지능력이 떨어지셔서, 혼자서는 멀리 다니지도 못하고, 작은 일처리도 힘들어하시고 많이 외로워하신다. 같이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문득 우선순위를 고민하는 내 자신에 많이 실망했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희생하며 지금까지도 걱정과 지원을 해주시는 어머님이 외로워하시는데 나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 핑계거리를 찾으며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다.
나는 결혼이후에 많은 혼란을 겪었다. 우선은 양가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인생관의 차이였다. 시부모님은 오로지 인생의 목표가 자식의 행복이신 분이셨다. 아버님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열심히 일하시며 근검절약하셨는데 그렇게 모은 모든 것은 다 자식들에게 물려주셨다. 어머님도 양말이 해지면 앞부분을 잘라서 기워 신으시면서도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는 항상 후하게 베풀어주셨다.

반면 친정 부모님은 본인들의 인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자식들에 대한 희생보다는 본인들의 인생을 즐기려고 하시는 편이다. 친정아버지는 60세에 일을 접으시고 평소 하고 싶으셨던 컴퓨터, 영어공부, 여행 등 버킷리스트를 충실히 실천하셨고 지금은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가르치신다. 우리아이들을 만나실 때마다 어려운 영어독해지문과 디지털기기에 대해 질문하시는 친정아버지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는데 막내 여동생의 대학입시시험 보는 날, 부모님께서 외국여행을 가셔서 (다른 형제들은 모두 출가해 있었다), 막내 동생이 혼자서 도시락을 싸서 시험을 보러갔었고, 대학에 합격하여 등록금을 낼 때에도 또 외국여행을 가셔서 나에게 대신 내달라고 부탁전화를 하신적도 있다.

다른 한 가지 혼란은 내 자신의 문제였다. 나는 결혼이후 새롭게 주어진 역할 때문에 항상 고민하고 힘들어했는데 항상 내 인생에 있어 우선순위를 어디다 두어야하는지의 문제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 그리고 새롭게 주어진 가족과 나의 의무….

물론 새로운 가족들이 소중하고 감격스럽고 예쁜 건 사실이지만 그로인해 내가 얼마나 내 자신을 내려놓고 내놔야하는지, 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해야 되는지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의 인생관 및 자식에 대한 가치관도 친정 부모님과 닮았음을 느꼈다.
시어머님은 신문과 책읽기를 즐겨하신다. 언젠가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과 위인전을 빌려 가시며, 이젠 성인들의 글과 책이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은  슬픈 목소리로 이젠 돋보기를 껴도 스탠드를 두 개씩이나 켜도 더 이상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마음이 아팠었다. 몸의 노화로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때의 기분은 어떨까? 나도 체념하고 익숙해져야 되겠지….
시어머님의 방은 추억소품들로 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이 없다. 시아버님과 자식들과 어머님의 부모형제들과의 얘깃거리가 가득한 아름다운 소품들…. 그 안에서 어머님은 다시 행복하시다. 이제 더 이상 슈퍼 맘은 아니지만 어머님의 추억세계에서 여전히 어머님은 자식을 돌보시고 지키신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선 바쁜 자식들에게 기대고 싶고 한번이라도 얼굴 더 보고 싶어 하는 해바라기이신 것을 나는 안다. 나또한 그러겠지. 인생은 유한하기에 지금의 하루하루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 했던가? 인생이라는 대순환 속에 나 또한 흘러가고 있다. 지금의 어머님은 내일의 내 모습일 것이다.

 김미경 대한여자치과의사 공보이사
 
출처: 데일리덴탈 201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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