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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칼럼

[월요시론/장주혜]열심히 달려온 그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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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은희 댓글 0건 조회 2,043회 작성일08-12-2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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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혜<본지 집필위원>


오랜만에 선후배나 동기를 마주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여자치과의사들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좀 피곤해 보이는 기색, 약간은 부스스 해진 머리 결, 살짝 주름지는 얼굴 외에 대체로 학교 다닐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인가 싶어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아도 대체로 비슷한 의견들이다. 여자치과의사들은 별로 늙지 않는다! 남자들은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가정에서 내조를 받으면서 가사와 육아에서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병원 일에 몰두 할 수 있다. 병원 업무가 끝난 후에도 자기개발을 위한 시간을 쓰기에도 자유롭다. 그에 비해 여자들은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아무 정신이 없는 채 살고 있는데도 살도 안 쪘고 늙지도 않았다면? 이 점에 있어서는 다들 고개를 갸웃한다.


공부,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슈퍼 엘리트 여학생인 알파 걸들이 학교의 상위권 석차를 필두로 입학시험 및 각종 자격증 시험을 휩쓸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성적을 기준해 남녀 차별 없이 등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돼서 시험성적을 내는데 특출한 여자들이 각종 요직에 입성할 수 있게 됐다. 치과계의 알파 걸들도 학교 다니고 병원에서 경력을 쌓는 데에서 과거보다는 남녀 차별을 덜 느끼고 승승장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여학생들의 삶은 남학생들과는 다르다. 여름방학 때 제주도를 무전 여행하는 것도 남학생들이고, 줄지은 소개팅 약속에 화려한 연애 경력도 남의 이야기 일뿐이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놀다가도 시험 전날 밤을 새워 바싹 공부를 하는 것도 주로 남학생들의 몫이다. 여학생들은 수업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노트 필기하고 제때 맞춰 시험 준비를 한다. 고작해야 적정선의 취미 활동 정도나 할까, 그야말로 ‘쓸 데 있는' 일만 하는 것이 재미없는 여학생들의 삶이었다.


어느 정도 막연해 보이던 성별 차이가 파격적으로 증폭하는 때는 결혼과 육아, 개원 등을 통해 가정과 사회에 입문하는 과정에서이다. 남자치과의사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적인 기반과 품위를 쌓아가는 일등 신랑감이 되는 반면에, 여자들은 갈수록 배우자 선택의 폭이 좁아만 간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육아휴직을 내는 것은 여자이고, 갓난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젖병을 떼고 말을 할 때까지 겪는 모든 과정들은 엄마의 일차적인 책임아래 이뤄지게 된다. 아무리 중요한 환자를 보고 있더라도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서 슬며시 손을 놓고 자리를 일어서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시 출근, 퇴근의 혜택을 입는 전문직 종사자인 만큼 걸머질 일들도 많다. 점심시간에 헐레 벌떡 급식 당번을 가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학부모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까 봐 눈치껏 학교행사에 헌신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진료 끝난 뒤에 아이들 숙제를 챙기러 쏜살같이 퇴근하느라 직원 회식은 물론이고 미팅도 변변히 갖지 못한다. 집안 경조사도 빠뜨리지 않고 챙기고, 명절날에는 전도 부친다. 바삐 사느라 내 친구들과는 소식이 끊겼어도 남편 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에는 나가야 한다.

 

 여기다 조금 시간이 난다면 겨우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해서 최신 임상정보를 얻어볼 생각을 한다. 온갖 집중력을 동원해도 제대로 해 나가기 녹녹치 않은 개원가 현실에서 도태될까 봐 걱정이 많다. 내원 환자의 숫자와 진료수익으로 성적이 매겨지는 개원가에서 받는 성적표는 학교 다닐 때 받은 내용과는 영 딴 판일 수밖에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 못하는 학생의 기분을 느껴보게 된다. 사회와 가정에서 받는 지지부진한 성적표 때문에 여전히 ‘허튼 짓'을 할 겨를이 없다. 혹시라도 뭔가 외부활동을 열심히 해 보려면 ‘무서운' 여자로 찍히고, 얌전하게 있자면 ‘무능한' 여자로 보인다. 저녁시간에 밖에 앉아 있자면, 집에 있는 아이들은 어떡하냐고 친절하게(?) 걱정해 주고, 참석 안 하면 그래서 역시 아줌마라는 말을 듣는다. 사회적 처세 또한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바와 다를 바 없다. 하루 하루가 행여나 긴장감을 놓치면 후루룩 흩어져 버릴 사안들로 팽팽하게 엮여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행복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 다른 형태이긴하지만 책임감과 각성으로 팽팽히 곤두서 있는 사람의 눈도 총총한 법이다. 간단히 말하면 감히 늙고 퍼질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남녀 역할 논쟁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이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남자처럼 따라 일하지 않아도 인정 받을 수 있는 여성 고유의 가치가 자리잡혀 가고 있다. 일하는 엄마들이 겪어야 하는 이 모든 좌충우돌도 한평생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세계보건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기대 수명은 78.5세, 여성은 82세이다. 지금부터 이삼십 년 후에는 100세 가까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복잡한 사안이 정리되고 난 뒤에도 50년 가까이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 때쯤에는 그 동안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하게 작용할 시기이다. 결국엔 열심히 살아온 그대,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반 평생 “쓸 데 있는 일' 만 하고 살았다면 만족스런 성적을 받을 수 있고, 행복도 역시 성적순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치의신보 1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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