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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칼럼

[조선경 원장의 감성충만] 대검과 부엌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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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민 댓글 0건 조회 20회 작성일15-09-1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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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 원장의 감성충만] 대검과 부엌칼
조선경(서울여자치과의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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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호]
승인 201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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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 ‘남편’은 혼인으로 여자의 짝이 된 남자를 그 여자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복지학사전에서는 남편의 역할을 수단적 역할(Instrumental Role)이라 하고, 부인의 역할은 표현적 역할(Expressive Role)이라고 했다.

수단적 역할은 가족의 사회적, 경제적 균형유지와 대외적 목적을 위한 관계를 수단적으로 수립하는 역할이며, 표현적 역할은 가족 성원 내의 통합관계의 유지, 정서적 지지, 긴장 완화의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역할분담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변화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여성이 자녀를 출산하여 양육하고 남성이 가족의 부양책임자로서 주로 직업에 종사하는 기본적인 분담이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기능적으로 융통성 있게 부부역할을 분담하기도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법률상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은 상의 차이가 없이 부부로서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묵시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역할은 사회적 관습이라 해석된다.

하지만 현재 워킹맘은 남편과 역할을 분담하지 못하고 가정일과 직장 일을 병행하며 이중고를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남편도 집안일에 관심이 많아서 많이 도와주기는 하지만 가사분담을 하는 수준은 아니고 도리어 집안
일을 늘려서 나의 휴식을 방해하곤 한다.

나는 월요일 밤에 고민을 상담하는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고민이 있는가 하면, 눈물을 자아내는 고민도 있고, 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 고민에 이르기까지 방송되는 많은 사연은 자정 12시를 넘기는 시간까지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그 중 가장 내 시선을 끌었던 고민은 뭐든 모으는 남편을 둔 아내의 고민이었는데 공감이 돼서 남편한테 시원한 화풀이를 하며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적잖이 위안을 받은 적이 있다.

남편은 수집이 취미인지라 이것저것 물건을 모아서 서재를 가득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집안에 있는 모든 공간을 크고 작은 장식품으로 빈틈없이 채운다. 종류도 다양하고 크기, 재질, 모양도 각양각색이어서 보관도 힘들고 청소하기 조심스러운 것들이 많아 결혼 후 나는 장식품을 지독히 싫어하게 됐다. 장식품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면서 정이 들어 내가 좋아하게 된 물건이 하나 있다.

옛날 장군들이 사용했을 것 같은 크고 웅장하며 칼집과 칼을 받치는 받침대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대검’인데 처음 남편이 집에 가져왔을 때는 장소도 많이 차지하고 어디에 넣어 놓기에는 크기가 부담스러워서 장식장위에 올려놓고 눈길도 주지 않는다. 없으면 빈자리가 느껴지지만 옆에 있다고 그리 소용되지 않는 대검은 존재 그 자체로 역할을 다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검과 달리 우리집 부엌에는 매일 나와 함께 음식을 만들며 정말 유용한 부엌칼이 있다.

‘부엌칼’은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잘 썰어내며 편리하게 쓰이지만 가끔은 내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어, 처음부터 싱크대 밑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부엌칼은 대검에 비해 하는 일도 많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지만 대검처럼 당당하게 집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부엌을 벗어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리고 보면 남편의 위치나 역할은 장식장위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대검과 같고, 나의 위치는 싱크대 밑에서 묵묵히 일만하는 부엌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집안의 모든 일을 감당하며 아이들 교육과 육아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남편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우리 집에서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 결혼 초 가사와 직장 일에 지쳐 남편을 원망하기도 하고 내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늙어가면서 측은지심도 생기고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말처럼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아는 사람이기에 이제는 없으면 허전하기까지 하다.

최근에 부쩍 드라마에 몰입하며 점점 아줌마가 되어가는 남편은 갱년기에 들어서면서 씩씩하게 남성화되어가는 나를 보며 섭섭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증가된 남성호르몬 때문인지 힘들고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가사를 노동으로 여기지 않고 얼마간은 즐기게 됐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육아도 보람을 느끼게 됐다.

매일 아침 나는 장식장 위 위용을 자랑하는 대검같이 침대위에서 늦잠을 자는 남편을 깨우고, 은장도와 같이 예쁘고 앙증맞은 아이들의 등교를 준비하며 바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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