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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칼럼

고양이와 나 - 정유란 대여치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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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민 댓글 0건 조회 49회 작성일15-08-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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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나

Relay Essay-제2052, 53번째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고양이들에게 안식처와 먹이를 제공하고 고양이들은 나에게 현재의 일상을 선물한다. 지금도 한 놈이 노트북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이 녀석은 컴퓨터 마우스에 관심이 많다. 또 다른 한 녀석은 건너편 책장의 네 번째 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녀석은 꼬리가 도톰하다. 그 도톰한 꼬리를 쭉 늘어뜨려 아래 칸의 책을 무심히 두드린다. 그 툭툭 소리를 듣고 어디선가 다른 한 놈이 달려온다. 책장에 앉아 있던 놈이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 앉아 장난을 칠 태세를 갖춘다. 그 때 노트북 뒤에 있던 놈이 마우스를 슬쩍 건드린다. 나는 그 고양이를 번쩍 안아들어 내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둔다.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 내 무릎 위에 누워있는 우리 둘째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녀석은 노랑이이다. 태어난 지는 이제 4개월쯤 되었다. 지난 봄, 첫째를 데리고 다니던 동물병원에 ‘무료 분양’ 딱지가 붙어 있길래 아기 고양이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들어갔다가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포대기 아래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작은 생명체는 내 손바닥위에 올라오자마자 달달 떨기 시작했다. 딱지가 내려 앉아 얼룩덜룩 했지만 녀석은 빛나는 노란색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 속에 그려진 여신의 나체 같은 빛나는 노란색. 그 빛깔에 반했던 걸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포대기에 싸여진 이 180그램짜리의 위태로운 생명체를 안고 집으로 달려왔다.
나는 이 작은 고양이에게 ‘치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물론 이 ‘이름을 지은 행위’ 자체는 나를 위한 일이었다. 고양이는 아마도 이름 따위는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분분한 학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커다란 상자 속에 누워서 잠만 자는 젖먹이 고양이에게 ‘치흐야’하고 이름을 불러보는 일은 분명히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동물 병원 선생님은 엄마 고양이가 이동을 하다가 치흐를 떨어뜨린 것 같다고 하셨다. 아마 누군가가 발견해서 동물병원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치흐를 무작정 데리고 왔던 나 자신 조차도 이 고양이가 우리 첫째처럼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불완전한 생명체가 걱정이 되어 자다가도 수시로 일어나 확인을 했고 ‘치흐야’ 하고 불러보았다. 뭐랄까. 그 때는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면서 생명을 윽박질렀던 것 같기도 하다.

치흐는 접시에 부어 놓은 따뜻한 분유조차 먹는 방법을 몰랐다. 못 먹을 뿐만 아니라, 아직 시력이 부족한 탓에 접시를 엎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당연히 분유가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서 엉망이 된다. 그 때 응가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온 몸에 똥칠(?)을 하게 되곤 했다. 부랴부랴 젖병을 사서 분유를 먹였다. 처음에는 이 것 조차 잘 먹지를 못했다. 다음에는 분유를 체에 거른 후에 젖병에 넣어서 먹여보았다. 다행히 잘 먹었다. 한 3~4일 쯤 지났을까, 이제는 울 기운이 생겼는지 배가 고플 때 마다 냐옹냐옹 울어댔다. 대략 5시간 간격으로 우는데 새벽에는 항상 3~4시쯤에 깨서 나를 괴롭혔다. 문제는 낮이었다. 내가 일을 하면서 집을 비우는 동안 이 어린 고양이에게 분유를 먹여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내가 점심시간마다 집에 와서 분유를 먹였다. 친구들이 애를 키우는 건지 고양이를 키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로 한 마디씩 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치흐는 이제 제법 기운이 세졌다. 젖병을 물려주면 네 발로 젖병을 꽉 움켜쥘 수도 있었고, 젖이 물리면 혀로 젖병을 세게 밀어냈다. 항상 설사를 했는데 드디어 똬리가 잡힌 응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자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 상자를 박박 긁으며 기운차게 울어댔다. 어느 날 집에 왔더니 상자가 바닥으로 완전히 넘어져 있었고 치흐가 바깥으로 나와 첫째와 놀고 있었다. 기가 막혔지만 그가 스스로 쟁취한 일이었다. 나는 치흐를 다시 상자에 넣지 않았다.
이유식을 거쳐 건식 사료를 먹게 되고 몸무게 400그램을 넘기면서 치흐는 완연한 고양이로서의 행색을 갖추게 되었다. 사냥감이 있을 때 자세를 잔뜩 낮추고 두리번 거리는 자세, 자다가 일어나면 앞다리를 쭈욱 뻗으며 기지개 켜는 자세, 어디선가 통조림을 뜯는 소리만 들어도 달려 나오는 버릇… 가끔씩 껴안아주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둥거리는 것 하며.
나의 4개월은 한없이 정적인 시간이다. 몇 번 일하고 퇴근하고 주말을 기다리다보면 지나가는 시간. 그런데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손바닥위의 가련한 생명체가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물건을 넘어뜨리는 화상(?)으로 변했다.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시간이다. 고양이들은 나의 정적인 일상을 쪼개고 쪼개 역동적인 순간으로 바꾸어 주었다. 워드로 한 줄씩 써 나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고양이들은 쉴 새 없이 달리며 장난을 치거나 수 만 가지로 자세를 바꾸며 잠을 자거나 오드득 소리를 내며 사료를 먹는다. 그렇게 고양이들이 내 일상을 윽박지르고 있다.
글쎄, 고양이는 ‘키운다’라는 동사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 생명체이다. 반려동물이라기 보다는 생활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주인이라고 애써 강조하지 않고 그들은 나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윽박지르는 객체일 뿐이다. 적어도 우리 고양이들과 나의 관계는 그렇다.

정유란  대한여자치과의사회 공보이사
 
출처: 데일리덴탈 201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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