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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칼럼

암살-광복 70주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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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민 댓글 0건 조회 61회 작성일15-08-1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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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광복 70주년에 부쳐

Relay Essay 제2048번째

 
지난 주말에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해방 전 만주의 조선 군관학교의 총잡이가 대장이 되어 3명의 암살단을 꾸려 일본인 조선 총독과 대표적인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내용이다.

1920년대부터 10년간 꾸준히 일본군을 괴롭혀 온 만주 지역의 김좌진 장군의 ‘북로 군정서’ 부대의 청산리 대첩 이후 보복으로 간도 대학살이 있었던 것과 해방 직전 조선에 진군하려고까지 계획했던 우리나라의 무장 독립운동 역사를 적극 증언한다는 점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무척 의미 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주제를,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어머니 사이에서 난 쌍둥이 여형제의 출생의 비밀과 처음에는 활동에 소극적이던 무장 독립 운동가들이 점점 상황에 몰입되어 목숨을 바치는 과정이 엮여 극적인 요소를 극대화 시켰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조승우, 김혜숙 씨 등의 베테랑 배우들이 특별 출연하여 영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믿었던 동지의 배신과 친일파의 아들의 희생 등이 반전 구도를 이루며 재미를 더했고, 마지막 임무 완수 때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울려 퍼지며 조선침략의 수구인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렸던 네발의 총성이 생각났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 광석동에서 진사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산으로 들로 다니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895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름 앞에 붙은 ‘도마’는 토마스의 중국식 발음인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자 1904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후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으며 고종황제 하야 이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1908년에는 대한 의군 참모 중장이 되어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1909년에는 단지회를 조직하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게 된다. 10월 중순 경 영미 신문과 ‘대동 공보’에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이 얼굴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실렸다. 안중근 의사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건너 온다.

이때 일본 첩보활동에 의해 이 계획이 이미 노출됐었을 수도 있었기에 이토 히로부미가 과연 하얼빈역에서 내릴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륙 침략의 발판인 만주 지방의 땅을 흥정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북상하고 있었고 그 행보는 조선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자신감 아래 가능하였다.
이토는 조선인들의 동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하얼빈역에 내려서도 수수한 옷을 비슷하게 입은 수행원을 여럿 거느리며 조심하였다.

그러나 만주 땅을 일본과 나눠먹기 위해 러시아에서 온 코코프체프는 아마 회담이 부드럽게 진행되기를 원했던지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에게 러시아군 사열을 부탁하였다. 타국의 군대 사열은 명예로운 일이었던지 아니면 외교적 결례를 범하기 싫었던 것인지 이토는 코코프체프에게 위험을 설명함이 없이 그대로 남의 나라 군대 사열에 임하였다. 감히 자기를 위험에 빠뜨릴 자가 없다고 내심 생각했는지, 회담의 당사자로서 호기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구구절절이 설명하기가 구차하게 느껴졌던지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날만큼은 이토가 자신감에 가득 찼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도 총알의 한계가 있었기에 누가 이토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암살 성공 확률은 낮아보였다.

아마 그건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늘은 오만한 자에게 화를 입히는 법. 여기서 이토는 일생일대의 실책을 범하고 만다. 마지막 순간에 일장기를 흔들면서 이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로 손을 들고 돌아선 것이다. 그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 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짧은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는 치명적인 3발의 총탄 중 세발을 이토의 가슴에 박아 넣어 절명시켰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문에 실리며 알려졌다.

이후에 안중근 의사는 떳떳이 자수하였고 독립군 자격으로 재판받기를 요구하였으며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조항을 들어 떳떳이 발표하였다. 그러나 재판이 공개된다면 일본의 입장이 난처해지며 만방에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꺾고 조선인의 기개를 알리고자 한 안중근 의사의 의도가 성공하는 것이 되었기에 일본 재판정은 안 의사의 권리를 무시하고 멋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그 소식을 들은 안 의사의 어머니는 편지를 보내어 항소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편지에는 ‘구구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한제국의 아들로 당당하게 죽으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안 의사에게 전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 속으로 낳아 키워 자랑스러운 내 아들을 당당하게 죽으라고 권유한 어머니의 심정을 말해서 무엇 하랴. 한일 합방 즈음의 우리 민족감정은 이렇게 남녀노소가 다르지 않았고 한마음이었던 것이다.

안 의사는 사형을 기다리며 뤼순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면서 그의 인품에 감화 받은 일본 교도관이나 주위 사람의 부탁으로 많은 글을 써 주었다. 그 글들은 명필이기도 하거니와 안중근 의사의 고결한 마음이 담겨있기에 현재 값을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형직전에도 일본인 재판장의 묵인하에 ‘대한독립’의 유묵을 남기고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하늘의 품에 안겼다.
식민지하의 설움과 광복의 기쁨이 우리 부모님들 기억에는 생생히 살아있지만 우리들은 소위 전후세대라고 하여 나라를 잃은 상황의 절망감이나 한국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세월은 흘러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다고 하니 무심한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영화에 보면 만주의 우리 동포들은 집에 물이 새도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향에 돌아갈 것이므로 고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가 그럴 줄 알았나, 해방이 올 줄 몰랐다’는 변절자의 외침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억압과 착취를 감당해야만 했던 민초들을 생각해 본다.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같은 조선인을 착취하고 자기 배를 불렸던 사람들은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본인의 생명을 대의에 바쳤던 독립 운동가들의 자손들이 제대로 대우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루 빨리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아 고국 땅으로 이장하여 안의사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

일제시대 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 또한 척박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한 우리의 마음속에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부지런하고 바르게 살아 갈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감사한 광복 70주년이다.
이안나  서울 로고스치과의원 원장
 
출처: 데일리덴탈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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