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보건기구에 따르면 건강하다는 것은 단순히 병이나 허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영적·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양호한 동적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건강보다 날씬한 몸매를 원하는 것 같다.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는 키160cm에 비만지수 70으로 저체중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체중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이어트에 신경을 쓴다. 1kg의 체중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열심히 운동하는 직원들과 잡지나 매체에서 쉬지 않고 내 눈과 귀를 자극하는 다이어트 광고는 단순히 무심함으로 일관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고 특히 여자들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연간계획에 체중감량이 반드시 들어가 있을 만큼 너나 할 것 없이 다이어트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비만한 사람은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한다고 하며 계속 먹어대고, 날씬한 사람을 더욱 날씬하기 위해서 과도한 운동과 절제된 식사로 살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나는 기름지고 맛있는 저녁만찬을 대할 때마다 수저를 드는 순간부터 밀려드는 염려와 불안으로 주저하지만 음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비참한 포만감으로 마무리한 후 밤 늦게까지 아파트 주위를 걸으며 자책과 후회로 하루를 마감하곤 한다.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넉넉한 4명의 개그맨들이 진행하는 먹방을 통해 각자의 방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들이 아낌없이 먹어대는 음식 양과 속도가 엄청났는데 그들을 보고 있으니까 정말 오랜만에 후련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그전에 어떤 먹방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건강을 생각해서 다이어트를 하는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사는지 알 수 없는 요즈음 세태에 비추어보면 음식 앞에서 그렇게 까지 솔직할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세상이 변했나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어렸을 적에 즐겨보던 뚱뚱이와 홀쭉이라는 무성영화가 있었다. 다소 엉뚱하고 사고뭉치지만 사람 좋고 유쾌한 뚱뚱이와 똑똑하지만 이기적이며 뚱뚱이를 골려먹는 다소 신경질적인 홀쭉이가 나와서 주제별로 펼치는 코미디였다. 나는 당하기만 하는 뚱뚱이가 불쌍하고 못되게 노는 성격 나쁜 홀쭉이가 꼴보기 싫다고 분개하며 열심히 보곤했다. 지금은 뚱뚱하다는 말이 언어폭력에 해당하지만 삼사십년 전에는 뚱뚱한 것은 넉넉하다는 좋은 의미였고 복부비만을 가진 남자를 배사장님이라 불러도 누구하나 불쾌해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결혼 적령기의 처녀가 너무 날씬하면 말라깽이라고 하며 어디다가 쓰겠냐며 어른들은 혀를 찼지만 넉넉한 여자에게는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고 덕성 복성을 외치는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요즈음 뚱뚱하다는 것은 나태와 게으름의 상징이 돼버렸고 인상 좋다는 말은 살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보는 사람들에게 얼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면 굳은 얼굴로 살이 쪄보이냐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역력히 드러난다. 예전에 미덕이었던 말도 요즈음에는 욕이 돼 버린 셈이다. ‘죽을 만큼 운동하고 죽지 않을 만큼 먹어서 살을 뺐다’는 연예인의 말이 너무 공감되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선천적으로 살이 찌지 않아 내가 보기에는 꽤 말랐는데도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음식을 가리고 내가 보기에는 작기만 한데 요즘 살이 쪘는지 얼굴이 커진 것 같다고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딸아이가 나를 슬프게 한다.
나 어릴 적에는 지금과 달리 음식이 없어 못 먹었지만 현재는 연간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양은 약 500만톤에 육박하고 서울시 기준으로 1년에 1인당 72마리의 치킨이 버려지는데도 다이어트를 위해 배고파야 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또한 요 며칠 계속되는 만찬으로 불어버린 체중을 걱정하며 밤바람을 해지고 반포천을 걷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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