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찾아온 한파로 웅크리고 지내던 12월 어느 아침에 최승희씨로부터 필리핀
 
의료봉사에 행정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기뻐하며 즉석

에서 동행을 결정했다. 의대에 근무한 일 외에 의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가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로 따뜻한 남

쪽나라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출발 당일 6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산더미

처럼 싸인 진료장비를 보고나서야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도착한 이튿날부터 다항아리 커뮤니티센터에서 진료가 시작되었다. 건물 1층 전

면의 일직선으로 놓인 테이블은 접수 → 혈압 → 진찰 → x-ray 순으로 배치되었

고 뒤편 방은 기공실, 2층에는 진료실이 설치되었다. 최승희씨는 혈압 재기, x-

ray 촬영 보조, 사진 촬영 등으로 바빴다. 나는 준비해 간 칫솔과 비타민을 나누

어 주었고, 2층에 진료 대기자가 너무 많아 혼잡할 경우에는 1층의 비좁은 틈새

에 순번대로 환자를 대기시키다가 몇 명씩 2층으로 올려 보내는 일을 맡았다. 진

료 틈틈이 선생님이 진료실에 올라가실 때는 기자재를 지키는 소위 ‘점방 보

기’도 했고, 오전 접수가 끝나면 테이블을 정리하여 배달된 도시락과 물병 정

돈, 식후에 마실 커피를 준비하였다.

봉사단 전원이 잠시도 쉬지 않고 맡은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셨고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진찰하다말고 어린아이와
 
머리를 마주대고 기도해주시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또 대기 순서대

로 분명히 줄을 세웠는데 잠시 뒤에 보면 아기를 안고 온 엄마가 없다. 소아치과
 
선생님이 오래 기다리지 않게 먼저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시는 것을 나중에야 알

았다. 환자들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와서 줄서느라 많이 피곤하고 짜증이 날만도 한데
 
잘도 참아준다.

완성된 틀니를 끼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며 함께 박수치고 축하해 주다보니 예정

된 사흘의 진료기간이 다 지나갔다. 마지막 날 오전은 봉사단 전원이 해상 판자

촌에 있는 바다 위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진료를 받은 안면 있는 얼굴들

이 많이 보였다. 오후에는 마닐라 시내에 있는 점령기의 스페인 총독 관저와 세

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성당을 둘러보았다. 성당에서는 호화로운 결혼식이 거행되

고 있었다. 그동안 만났던 해상판자촌 사람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없는 딴 세상
 
사람들을 보며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매연과 소음, 무질서 속에서도 여유롭게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축

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잊고 지내던 나 자신을 단련

시킬 수 있는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신 대한여자치과의사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린

다.